[마이다스 교육칼럼 #1]학교에 다녀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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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전통적인 장례 문화에서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그가 어떤 직업에 종사하였는지를 불문하고 묘비에 "학생 누구누구 지묘" 라고 남게 된다.
이는 그가 죽는날까지 배우는 입장에 있다는 완곡한 표현이다. 반면에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는 이는 이 학생이라는 표현이 묘비에서 빠진다. 전통적 유교 관념에서의 배운다는 것은 이런 개념이다. 일생동안, 그리고 무덤에 가서도 가르치는 이를 제외한 모든 이는 학생이다. 오늘은 이 배움에 대한 나의 생각을 한번 살펴보려고 한다.



궁극적으로 학문에 뜻을 세우고 그에 대하여 깊이 파고드는 학자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은 실제 생활에 도움을
받기 위하여 배움을 행한다. 그러나 대부분 학교 교육 등 정식적 교육과정에 따라 배움을 수행해 온 사람들은 학교가 나에게
가르친 것이 현실생활에서 도움이 전혀 되지 않거나 아주 일부분만 도움이 된다고 말하곤 한다.
이 표현은 일부 맞고, 일부는 틀렸다. 학교에서 배우는 여러 깊이있는 학문의 기본적인 틀은 현실적으로 실무와 다르며 그 텍스트를 달달 외운다고 해서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배우는 활동을 하는 학교의 교육과정에서 실질적인 목적은 지식, 이해, 적용, 분석, 종합, 평가에 대한 틀, 그러니까 사고의 방식을 양성하는데에 있다. 따라서 지식을 이해하고, 현실생활에 적용하며, 새로운 상황을 내 학문적 틀에 의하여 분석하고,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 및 평가하는 틀을 만드는 것이 학교교육의 궁극적인 지향점인 것이다.

 
즉 현실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평가기준을 만드는 것이 교육의 핵심적 기능이다. 텍스트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따라서 학교교육이 만들어낸 '시험'의 제도 역시 이러한 학교교육의 궁극적 목적에 따라 변천하고 있다. 60년대, 70년대의 학교교육은 "제대로 지식을 입력했는가?"를 물은 반면, 오늘날은 학교 시험이나 공무원시험 등 각종 시험에서 "배운 것을 제대로 적용할 수 있는가?" 를 묻는 방식으로 변형되고 있다. 따라서 과거에 공부깨나 했다는 사람들이 현대의 시험문제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요즘 공부좀 한다는 아이들이 과거의 시험문제에 손도 대지 못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해 진 것이다.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가?
 
공자는 주역을 삼천번 읽었다고 한다. 과거의 공부는 그러했다. 같은 책을 수천번 수만번을 읽어 그 행간의 의미까지 모조리 학습하는 방식이다. 과거의 공부방식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는 "독서백편의자현" (백번 책을 읽으면 그 내용이 자연히 밝아진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공부는 한 텍스트를 완벽하게 학습하는데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텍스트가 너무나 방대해졌다. 또한 시대는 텍스트가 머물러 오랜기간 진리이기에는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의 공부는 재빠르게 텍스트가 가지는 요지를 파악하고 이것이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텍스트에서 바라본 관점을 자기화 해서 빠르게 활용하는 방식으로 변경되고 있다.

 


소년이로학난성 -          소년은 늙기 쉽고 배움은 이루기 어렵나니
일촌광음불가경 -                  일각의 시간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
미각지당춘초몽 - 연못가의 새싹이 봄날의 꿈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계전오엽이추성 -        계단 옆의 오동나무는 가을 소리를 듣노라.

따라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학생(아직 죽지 않은 자)는 어떤 텍스트를 보든, 이것이 어떻게 현실과 관련이 있는지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반문하여야 하며, 책의 관점으로 새로운 상황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연습을 반복해야 한다.
학교는 지속적으로 적용하고 이해하고 평가하는 능력을 기르고자 할 것이며, 시험은 이 능력을 확인하는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배움이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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