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12.12는 반란이다!'며 신군부 맞선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장군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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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대학 졸업논문으로 '보안사령부 해체'를 주장하기도 하였고, 전두환의 12,12 쿠테타에서 전세가 기울어 전두환이 승기를 확실히 잡은 상황에서도 "반란군으로부터 수도를 방위하는 것은 수도경비사령관의 임무" 라며 끝까지 저항하여 신군부의 미움을 받기도 하는 등 풍운의 삶을 산 장태완 전 국회의원이 향년 7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장태완 / 정치인,국회의원
출생 1931년 09월 9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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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신속한 장교 육성을 위해 만들어진 육군종합학교 출신인 그는 전두환을 위시한 하나회 출신 장성들과 앙숙이었는데 반란을 막으려 했다는 이유로 지금은 없어진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45일간 조사를 받고 소장으로 강제예편을 하게 됩니다.

장태완 장군은 수경사령관 취임 1개월만에 발발한 12,12 사태에 대해 이렇게 회고합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하나회원들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했을 때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

"그러나 진압 책임을 맡은 내가 백기를 들 수는 없었고, 죽기로 결심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더라"


전두환의 반란군에 패한 '패장'이 된 장태완장군이 체포되는 장면을 TV로 본 장태완 장군의 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하고 막걸리만 마시다가 세상을 등졌고, 얼마 후 당시 서울대에 재학중이던 외아들은 행방불명 후 동사한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이후 국회의원 및 재향군인회 회장을 역임한 그는 "반란군의 주역"들을 사법적으로 처단하기 위하여 일생을 바쳤습니다. 

(12,12 쿠테타의 주동자들)

국회 진상규명위원회 등에서 이같은 반란군 수장들에 대한 폭로에 힘입어 상당수 반란을 주도한 하나회 소속 장성들이 역사의 심판을 받도록 만들었으며,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다시는 쿠테타가 일어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며 쿠테타에 대한 연구에 몰두합니다.

장태완 장군은 투병중이던 폐암으로 지난 26일 별세하였습니다.

빈소 : 아산병원 장례식장

더 알아보기. 1212사태란?
 
12·12사태 []
요약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
언제 1979년 12월 12일
어디서 한국
누가 전두환, 노태우 등의 신군부세력
무엇 군사반란
어떻게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연행하고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를 협박하여 사후승인을 받음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참고>
장태완 장군의 일생

1930 출생

1950-소위임관(종합학교)

1952-중위

1953-대위

1957-소령

1961-중령

1966-대령

1971-준장

1976-소장진급

1980-소장예편

 

위의 진급표는 위의 분 답을 옮겨온 것입니다.^^

 

장태완 장군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 동신초등학교에 자리잡은 육군종합학교에서 단기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합니다.

당시 육군종합학교 출신들은 총알받이 소모소위라는 개념이 있을 정도였는데 전란중에도 용케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다가 1971년 육군종합학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육군 장성에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한신 장군 휘하의 1군사령부 참모장으로 근무했었고 1973년 진종채 장군의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으로 임명됩니다.

이때 훗날 대통령이 되는 전두환 장군의 동서였던 김상구 중령과 다툼이 일너나는데요

당시 김상구 중령이 장태완 참모장과 포배치 문제로 싸우다가 그만 항명을 일으키자

장태완 장군은 상부에 건의하여 헌병대로 하여금 체포케 하여 영창에 집어넣고는

예편시켜 버립니다.

이때의 일로 전두환 장군은 장태완 장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76년 소장 진급 후 26사단장을 맡았고 육군 교육참모부장을 거쳐 수경사령관에 임명됩니다.

당시 그러니까 1979년 11월입니다.

원래는 인사의 필요성이 없었으나 수경사령관 전성각 소장이 계급정년에 부딫히자

중장으로 진급시켜 주기 위하여 정승화 총장이 전성각 장군을 중장진급과 함께 3군단장으로 임명시켰고 이 자리에 장태완 소장을 임명하였지요.

그러나 이같은 인사는 정규육사 출신의 전두환 장군을 위시한 하나회 세력에게 반발심을 심어주기 충분했고 결국 12.12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을때 장태완 장군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결국 전두환 장군측이 승리하여 칼자루를 쥐게 되고 장태완 장군은 패장이 되어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지금은 없어짐)에서 45일 동안 조사받고 풀려납니다.

그러고는 예편이 되는데 당시 체포되고 이틀 후 장태완 장군의 구속사실이 뉴스에서 알려지게 되자 그 소식을 들은 장태완 장군의 부친이 충격을 받고 술로 연명하다가 그만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던 장성호씨의 경우 1980년 서울대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였으나 아버지의 불행으로 약간의 우울증에 시달린 끝에 1981년 봄에 경북 어딘가에서 자살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됩니다.

 

이후 장태완 장군은 신장질환을 앓았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으나 미국에 거주하던 사위의 도움으로 무사히 수술을 받아 성공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이후 12.12 군사쿠데타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한 운동과 관련자 고소고발을 주도했으며 2000년에는 16대 국회에서 민주당 전국구로 국회의원을 지냅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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