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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夢李白(이백을 꿈꾸며)

 

 

두보                                       

 

뜬 구름 종일 떠가고

 

나그네 오래도록 오지 않는구나.

 

삼일 밤 번번이 그대 꿈꾸니

 

다정한 님이여, 그대 뜻 알겠네.

 

간다고 알릴 때 항상 풀 죽어 있고

 

오기 쉽지 않다고 괴로이 말하네

 

강호에 많은 풍랑이매

 

배 젓는 노 떨어 뜨릴까 두려워하네

 

문 나서며 흰머리 긁으니

 

평생의 뜻을 저버린 듯하네

 

높은 벼슬아치들 장안에 가득한데

 

그대 홀로 초췌하네

 

하늘 그물은 한없이 높다고 누가 말했소.

 

늙어서 도리어 죄를 뒤집어 썼는데.

 

천추만년에 이름을 남긴다 해도

 

쓸쓸히 죽은 다음의 일인 것을......

                 

 

 

 

 

천하의 대 명장도,

 

일세의 대 지장도,

 

죽어지면 한낱 재...

 

가는 세월 야속하다.

 

만세에 이름 남는 것이

 

오늘 삶만 못하노라.

 

 

 

시를 읽고 마이다스 쓰다.

 

 

 

 앞서 포스팅한 봄날 이백을 그리워하다 라는 시에서 나타나듯 이백에 대한 두보의 그리움은 상당한 수준이었던 듯 합니다. 비록 그것이 약간의 질투심을 동반한다고 하여도 말이죠. 두보가 그토록 동경하던 시인. 이백이 죽었다는 소문을 어느날 두보는 듣게 됩니다. 그것도 누명을 뒤집어 쓰고 귀양길에 오르다가 죽었다고 말이지요. (사실은 이백이 귀양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 당시 이백의 나이가 59세, 당시로써는 노인이었기 때문에 노구로 먼 길을 유배가게 되었으니 응당 죽었으리라 생각한 겁니다.) 아.. 불쌍한 두보.. 그는 이백의 죽음에서 자신의 비참한 종말을 엿본듯 합니다.

 

슬픔에 젖어 눈물 흘리며 시를 써 내려가는 두보.. 그가 이 시에서 쓴 千秋萬世名(천추만세명 : 천추만년에 이름을 남기다)은 덧없는 명예에 대한 비유로 지금까지 곳곳에서 인용될 정도이죠.

 

 하지만 반전이 있었습니다. ㅋㅋㅋ 이백은 사실 귀주성 야랑으로 유배되어 갔다가 사면받고 나왔거든요. 하지만 옛날에는 전화도, 인터넷도 없던 시대이니 꼼짝없이 이백이 죽었다고 두보는 믿었던 겁니다. 서신같은 것도 쉽지 않고 한 마을에서 발생한 소식이 다른 곳에 전파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던 당시에 발생할 수 있는 해프닝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 시를 통하여 존경하는 이의 죽음을 접한 자가 내뱉는 명예와 삶의 본질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해는 이태백이고 달은 두보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詩仙과 詩聖 이 두 거인의 만남을 해와 달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고는 합니다. 둘의 인연은 단 두번의 만남으로 끝났지만 두보는 평생 이백을 동경했고 이백은 두보의 시에 경탄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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